시에라산맥 비숍

며칠 전 한국에서 카톡으로 설악산 단풍 사진이 한보따리 배달되었다. 울긋불긋 화르르 설악산을 태우고 있는 단풍 감상에 빠져 있을 때 전화가 울렸다.
미국 단풍사냥 시기에 촉을 세우고 있던 정임수 시인의 연락. 때를 맞춘 이심전심이다. 시에라네바다산맥 단풍이 절정이라는 말과 함께 당장 떠나자는 채근.
고산준령 시에라산맥의 가을 풍경은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렇기에 정 시인의 재촉을 이해하는 것이다. 배낭을 꾸린 우리는 3박4일 단풍기행에 나섰다. 처음 목적지는 산간도시 비숍Bishop. 산맥 동쪽 기슭의 비숍 일원은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유명한 아스펜 단풍 군락지. 이곳 아스펜 나무들은 유독 짙은 노란색 때문에 ‘황금 아스펜’으로도 불린다. 그곳 야영지를 베이스캠프 삼아 주변 단풍 명승지 탐방과 산행에 나선다는 계획.
395번 고속국도는 유명한 풍경도로다. 시에라산맥과 평행을 이루며 북쪽으로 달리므로 곳곳에 절경지를 품고 있다. 서부영화에서 자주 보았던 롱파인Long Pine마을을 지나며, 왼쪽으로 미국 본토 최고봉 휘트니가 우뚝하다. 정상엔 벌써 눈이 하얗게 내렸다. 시나브로 시에라네바다산맥은 내년 봄까지 지금부터 깊은 겨울잠에 빠져 들것이다.
LA를 떠난 우리는 빅파인Big Pine을 지나 5시간 만에 목적한 비숍을 만났다. 산속을 점령했을 단풍은 아직 상기 일러 비숍시내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목적한 포 제프리Four Jeffrey캠핑장은 비숍에서 168번 국도를 따라 더 올라가야 한다.

역광 속에 빛나는 단풍
고도를 높이며 점점 아스펜이 노란색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유명한 사브리나 레이크로 들어가는 길목으로 접어들며 자주 차를 세웠다. 놓치면 후회할 풍경이 자주 나타났기 때문. 깊은 가을에 잠긴 산 속은 이제 온통 노란 단풍 세상이다.
비숍시내가 아득하게 보일 정도로 시에라산맥을 올라서니 기막힌 도원경이 펼쳐진다. 도로 곁은 아예 아스펜 샛노랑이 점령해 버렸다. 우리처럼 사람들도 차를 세우고 사진을 찍고 있다. 비숍, 맘모스 레이크, 준 레이크, 그리고 레이크 타호까지 이렇게 단풍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의 베이스캠프가 될 포 제프리 캠핑장도 단풍 바다 속 섬처럼 빠져 있다. 샛노란 아스펜 바다에 눈부신 햇살을 퉁겨내는 숲속 캠핑장은 산 좋아하는 우리에겐 특급호텔이다. 화장실도 수세식이고 노란 터널을 이룬 계곡엔 맑은 물이 조잘대며 흐르는 기막힌 풍경. 다만 이곳 단풍은 설악산처럼 울긋불긋이 아니다.
황금빛 노란색 단풍이다. 미국 대륙 아니랄까봐 그 넓이와 크기에 그야말로 압도당한다. 대지가 온통 노란색으로 채색된 이유는 아스펜 나무 때문. 한국에선 사시나무로 불리는 게 아스펜 나무였다. 아스펜도 높은 산을 좋아하는지 고도 2,000~3,000m 사이에 밀집해 숲을 이룬다.
물을 좋아하는 아스펜은 산이 흘려주는 시냇가에서 우점종을 이루고 있다. 비숍 부근의 많은 크릭이나 호수가 바로 그런 장소이기 때문에 이곳이 명소가 된 것. 따라서 수많은 호수에 잠긴 노란 단풍의 반영을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고즈넉한 밤을 “타타닥” 소리를 내며 타는 장작불과 와인을 곁들여 보냈다. 뜨거운 물로 채워진 날진Nalgene 물통 덕에 침낭 속이 따뜻했다. 기분 좋은 아침을 맞았다. 오늘은 이곳 명소 중 핫스팟이라 불리는 아스펜 델Aspen dell이란 마을을 찾기로 했다. 사진은 ‘빛의 예술’이라던 사진작가들 말이 실감난다.
아침 햇살 속 역광으로 보이는 황금빛 단풍은 노란색만이 아니다. 농담濃淡의 실상을 눈으로 확인했다. 단풍을 희롱하는 빛의 향연. 소묘나 서예 등에서 말하는, 짙거나 옅은 농담의 분류. 그걸 역광에 빛나는 단풍이 알려준다. 초묵, 농묵, 중묵, 담묵, 청묵이라는 게 어떤 말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황금빛 동전을 닮은 단풍
점차 고도가 높아가며 노란 단풍색도 점점 짙어지기 시작한다. 여름한 철 푸름을 뽐내던 아스펜 나무들이 마지막 힘을 모아 봉화처럼 불타오르는 숲을 만들었다. 유럽풍 주택들이 모여 있는 마을이 나타났다. 노란 숲 바다 속에 섬처럼 떠 있는 아스펜마을은 과연 동화 속 그림이다.
시인 김영랑이 말했던가? ‘오매, 단풍 들것네’라고. 하도 단풍이 고와 얼굴이나 마음까지도 물들겠다는 남도 사투리의 구수한 은유. 이름까지 아스펜이라는 마을을 거닐며 그 시적 상상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정임수 시인의 사진촬영이 흡사 사냥꾼 총처럼 풍경을 잡아내느라 바쁘다. 단풍사냥꾼은 정 시인만이 아니었다. 단풍이 제철이라는 소문에 우리처럼 찾아 온 탐승객이 많기도 했다.
꽃은 산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핀다. 단풍은 고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온다. 꽃이 열매를 얻으면 미련 없이 지듯, 나뭇잎도 제 할 일 끝나면 단풍으로 진다. 그러므로 산을 점령한 단풍을 가을꽃으로 불러도 무방할 터!
사브리나호수를 지척에 둔 오른쪽으로 비포장도로가 있다. 우리 탐방 리스트에서 가장 높은 곳인 해발 2,700m가 넘는 노스 레이크를 찾았다. 겁이 날 만큼 높은 도로를 오르니 광활한 분지가 나타났고, 거기에 노스 레이크가 있었다. 이곳은 처음 오는 곳이다. 고도차가 다른 만큼 단풍의 농담 역시 색감에서 차이가 난다.
분지를 가르는 시냇물과 광활한 우뚝한 산. 호수를 따라 트레일이 보였다. 걷다 보니 반짝이며 쏟아지는 햇살도 노랗다. 햇살이 무수한 노란 단풍을 투과해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호수에 가라앉은 노란 아스펜 숲의 반영은 또 다른 그림.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건 만산홍엽이 아니라 만산황엽萬山黃葉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아스펜 단풍이 부딪히며 맑은 노래를 한다. 과연 오감이 행복하다. 호수 뒤로 우뚝한 시에라네바다의 고봉들. 그 정수리엔 신설이 내려앉아 하얗게 햇빛을 퉁겨내고 있다.
호수 건너편 우람한 시에라네바다 바위산들이 짙푸른 하늘을 떠받치듯 우뚝하다. 그중 가장 높아 보이는 봉우리는 4,000m가 넘는 펠리세이드봉이 분명할 터. 그 산을 오를 때 아스펜 나무숲에 텐트를 쳤었다. 물을 좋아하는 아스펜과,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사람의 공통점. 아스펜 모양새를 자세히 기억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런 인연의 연결 때문이다.
호수에 잠긴 아스펜의 노란 반영을 감상하며 걷는 길엔 추임새로 음악도 따라왔다. 마른 아스펜 잎사귀가 서로 부딪치며 “차르르 차르르” 합주하는 노래. 금속도 아닌 나뭇잎이 동전의 부딪침처럼 청량한 울림으로 귓전에 다가선다.
그러고 보면 나뭇잎은 하트를 닮았다. 작은 바람에도 수천수만의 노란 하트가 무시로 흔들리는 모습은 장관이다. 아스펜을 우리는 사시나무라고 불렀고, 겁먹어 떠는 모습을 ‘사시나무 떨 듯 떤다’고 말했다. 그런 기억을 떠올리며 흔들리는 단풍을 보니 슬쩍 미소가 번진다.

아름답고도 끈질긴 생명력
노스 레이크에서 내려 온 우리는 사브리나호수로 달렸다. 사브리나호수를 오르는 도로 양쪽이 눈부신 단풍터널을 이루었다. 넓은 분지를 가르며 흐르는 크릭에서 강태공 하나가 허리까지 몸을 담근 채 플라이 낚시를 하고 있다.
아스펜 단풍이 녹아 있는 시냇물과 낚시꾼은 그대로 수채화 속 풍경. 단풍이 드리워진 사브리나호수는 과연 이발소 그림을 닮듯 상상 속 선경이다.
큰 나무 한 그루 전체는 봉홧불처럼, 작은 나무는 촛불처럼 타오르는 풍경. 몽환으로 이끌며 길을 나서게 한 황금빛 아스펜 숲. 그런데 아스펜의 뿌리는 땅 밑으로 대나무처럼 서로 얽혀 있다고 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라보는 아스펜 숲은 사실은 하나의 생명체일 수도 있다. 그리하여 한꺼번에 단풍이 드는 걸까?
시에라산군엔 산불이 잦다. 자연적 산불이다. 사브리나호수를 에워싼 산등성이 여기저기 산불의 흔적이 보인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숯으로 변해 있는 흉물스러운 모습도 많다. 그런 가혹한 자연재해에서도 아스펜 나무들은 살아남았다.

사우스 레이크와 비숍패스
덩치 큰 파인트리들이 숯으로 변했어도 아스펜은 끄떡없이 견뎠다. 산불이 아무리 심해도 뿌리만 살아 있다면 아스펜은 다시 부활한다. 가볍게 흔들리는 잎사귀를 보면 덩치 큰 제프리 소나무보다 확실히 연약해 보인다. 하지만 이런 생존 능력 때문에 어느 아스펜 숲은 8만 년을 넘기고 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이곳의 단풍순례는 사우스 레이크만 남겨 두었다. 남쪽 호수의 아스펜 단풍은 호수보다 그곳에 이르는 계곡이 백미였다. 길고 긴 계곡을 따라 노랗게 단풍을 피워 낸 아스펜 숲은 그 품에 몇 개의 캠핑장을 품고 있다. 사브리나의 명성에 가려 이곳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으나 그 깊은 속살을 아는 사람은 여기를 더 사랑한다.
그걸 아는 사람은 물론 다리 힘 좋은 산악인들. 사우스 레이크가 산악인들에게 더 사랑을 받는 이유는 이곳에서 출발하는 비숍패스 트레일Bishop Pass Trail 때문. 이 트레일은 시에라산맥에서 인기 있는 루트 중 하나로 꼽힌다. 전에 비숍패스 산행기를 소개했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올라 트레일을 따라 한참 올랐다.

‘산천은 의구하다’는 말처럼 예전의 행복했던 기억이 노란 단풍처럼 화르르 살아났다. 노란 터널을 지나 고도를 높이며, 이제는 단풍사냥꾼이 아닌 많은 산악인을 만났다. 그들이 메고 있는 키만 한 배낭이 보기 좋다. 거미줄처럼 많고, 그림처럼 예쁜 트레일을 따라 깊은 가을 밤을 몸으로 즐긴 산악인들.
롱 레이크Long Lake까지 갈 요량이었으나, 시간에 쫓겨 달콤한 소풍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우리는 이스턴 시에라의 보석이라는 준 레이크June Lake 쪽으로 갈 것이다.
그곳엔 카슨 피크(3,325m)가 있고, 그 자락에 작지만 보석 같은 호수 두 개가 연결된 산행이 기다린다. 과연 거기에선 어떤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월간산 12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