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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오면 비를 맞고, 산이 부르면 산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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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엔 빗금이 쉴 사이 없이 그어지는 궂은 날씨.

제43회 산악축제가 시더글렌 캠프그라운드에서 무사히 막을 내렸다.

 

카풀 집결지인 라운드피자 주차장에 도착하니 하늘이 울고 있다.

금방이라도 장대비를 쏟아낼 듯 심술 가득한 하늘 표정.

 

‘이 날씨에 과연 몇이나 나올까?’ 하는 의구심도 잠시.

빗금을 뚫고 산악인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존재감 하나만으로도 든든한 대들보인 왕고참 김명준 선배님 내외분.

한미산악회 박종석 회장과 회원들도 일찌감치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축제에 쓸 장비와 제수 음식을 말없이 나누어 싣는다

‘고마운 셰르파이자 포터’ 역할을 자처한 그들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훈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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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산악회가 해마다 치르는 이 산악축제는 다의(多意)롭고 각별한 뜻을 품고 있다.

한 해 동안 험한 산길에서 다친 이 없이 무사히 산행을 마쳤다는 고마움.

있건 없건, 마음속 산신령을 향한 감사의 인사 제례였다.

 

또한 흩어졌던 산우들이 모여 회포를 푸는 잔치.

그리고 다가올 새해의 무탈을 미리 빌어보는 시산제(始山祭)이기도 했다.

 

먼저 세상을 떠나 산의 침묵 속으로 깃든 옛 동지들을 추모하는 날.

남은 이들의 서로 다독이며 결속을 다지는 시간.

 

무려 43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온 산제.

우리 산악회를 상징하는 가장 큰 전통 의식이다.

 

한참 잘 나가던 호시절엔 수백 명이 모였다.

구름처럼 몰려온 산악인들.

꽹과리를 치고 북을 울리며 온 산을 뒤흔들었었던 축제.

 

세상의 모든 온기를 얼려버린 팬데믹 이후, 우리 축제의 덩치도 눈에 띄게 쪼그라든다.

몇 해째 흉허물 없는 오랜 지인들만 모시는 조촐한 살림살이로 바뀌었다.

 

그런들 무슨 대수랴.

수백 명이 모여 왁자지껄 풍악을 울리는 축제도 바람직한 봉사였다.

몇몇이 모여 진심을 나누는 오붓한 산제도 그 나름대로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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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두 이사의 사회로 드디어 제43회 산제가 막을 올렸다.

사회를 보며 김종두 이사는 이 제례가 미신이나 특정 종교가 아닌 걸 강조한다.

 

‘한국의 유구한 민속 전통문화 행사’임을 미리 알렸다.

혹시라도 참석자 중 신앙의 결이 달라 오해할 여지를 생각한 발언.

 

제주(祭主)로 나선 유경영 회장 표정이 엄숙하다.

회장이 초헌관이 되어 비에 젖은 깔개 위에 넙죽 삼배를 올린다.

 

가랑비가 옷깃을 촉촉이 적시는 쌀쌀한 날씨.

둘러선 이들의 표정만큼은 히말라야 8천 미터 베이스캠프 못지않게 사뭇 엄숙하다.

 

이어 윤형석 회원의 선창으로 ‘산악인 백자선서’가 울려 퍼졌다.

“산악인은 무궁한 세계를 탐색한다.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정열과 협동으로 온갖 고난을 극복할 뿐 언제나 절망도 포기도 없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백자선서를 복창한다.

매년 읊조리는 글귀임에도 들을 때마다 온몸에 전율이 인다.

 

산을 대하는 인간의 자세를 이토록 서늘하고도 숭고하게 밝힌 명문이 또 어디 있을까.

이 절절한 문장을 빚어낸 노산 이은상 시인.

 

시인은 김명준 선배님 부부의 결혼식 주례를 맡으셨던 분이다.

그 옛 인연이 시공을 넘어 오늘 이 시더글렌 산제 자리에까지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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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철 회원의 축문 낭독 순서가 되었다.

그런데 아뿔싸, 연습이 부족했던 모양.

 

제례의 시작을 알리는 축문의 장엄한 첫마디.

저 유명한 “유~세~차(維歲次)”를 냅다 건너뛰고 바로 본문으로 직진해 버렸다.

 

제사에는 진심인 유 회장에게서 나중에 한마디 들었다.

역사적 보존을 위해 그 ‘국가기념물급’ 축문의 원문을 여기에 옮겨둔다.

왜 국가기념물이냐고?

 

해마다 토씨 하나 안 바꾸고 오직 날짜와 육십갑자 연식만 갈아 끼우는 불멸의 명문이니까!

 

유세차(維歲次)

단기 사천삼백오십구년 병오년 시월 십일일, 저희 재미한인산악회 회원 일동은, 강호 선배 제현을 모시고, 이곳 미합중국 캘리포니아의 시더 글렌 캠핑장에서, 이 땅의 모든 산하를 지켜주시는, 지고지존의 신령님께 삼가 고하나이다.

산을 사랑하고, 산행을 통해 지성과 우정을 쌓으며, 천리를 깨우치고자 재미한인산악회가 발족한 지, 이제 마흔네 해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아무 사고 없이 한결같이 보살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발원하옵기는 내년에도 함께 하시어, 안전 산행을 지켜주옵시기를 앙망하옵니다. 미국의 산은 물론, 해외의 산을 향한 도전계획을 세우고, 몸과 마음을 닦으며, 정열과 의지를 굳히는 모든 산악인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산악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별하신 보살핌을 주옵소서. 그들의 산행을, 가정을, 사업을, 안전하고 행복하고, 풍요롭게 이룰 수 있도록 굽어살피옵소서.

이제 조촐하오나 엄숙한 제례를 통하여, 우리 악우들의 뜻을 모아, 정성을 담은 제수를 올리오니, 부디 강림하시와 흠향하시옵소서.

 

이천이십육년 시월 십일일, 재미한인산악회 회원 일동

 

아헌과 종헌의 예를 마쳤다.

한미산악회 박종석 회장과 회원들도 차례로 분향하고 정성스레 잔을 올렸다.

 

마침내 참가자 전원이 산신령께 삼배를 올리는 것으로 1부 산제는 매듭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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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음식을 나누고 잔을 돌리는 음복과 함께 시작된 제2부.

그야말로 ‘대본 없는 100% 즉흥 라이브 쇼’였다.

 

전통 제례에 축가가 빠질 수 없다.

산악회의 조용필이라 불리는 곽노만 회원이 초청 가수로 낙엽장식 무대에 올랐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통기타를 둘러메고 올라오는 건데!)

 

마이크도 반주도 없는 생목 라이브로 터져 나온 그의 선곡은 〈삼포로 가는 길〉.

“바람 부는 언덕 넘어, 삼포산으로 가는 길 있겠지~”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맞다.

과연 산꾼의 노래답게 복창은 삼포 포구가 아니라 삼포산이다.

 

조용필은 삼포로 부르지만 청중은 후렴마다 기어이 삼포산이러고 악을 쓴다.

 

이어 윤혜경 회원의 즉석 ‘귀로 듣는 수필’ 코너.

제목은 〈산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산신앙 고백을 유도한 것.

 

단 3분간의 육성 낭송이었는데, 그야말로 몸이 바들바들 떨릴 만큼 감동적이었다.

사전 준비가 없는 상태에서 어쩜 저토록 청산유수로 말을 엮어낼 수 있을까!

 

말하는 본인도 지금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가는지 모른다.

비 맞으며 듣는 우리도 당최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는 기기묘묘한 말의 잔치.

 

원래 천하의 심오한 고승들이 나누는 ‘선문답(禪問答)’이 본디 저런 법이다.

물론, 듣다가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린 결정적인 이유는 누구도 모른다.

 

감동 때문인지, 아니면 뼛속까지 파고든 한기 때문인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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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덕담을 한 한미산악회 박종석 회장의 말은 알아 듣기 쉽다.

그야말로 ‘산 구신들끼리의 무언의 교감’이었으니까.

눈빛만 봐도 서로 알아보는 뚜벅이들만의 끈끈한 연대감.

 

“우리는 한 뿌리에서 시작되었으니, 서로 밀어주고 당겨주며 함께 산길을 걷자”

그의 담담한 한마디가 차가운 빗금속에서 따스한 불씨처럼 가슴을 데워준다.

하긴, 뚜벅이의 속마음을 뚜벅이가 아니면 그 누가 알아줄까.

 

이렇게 가을비의 축복을 흠뻑 맞으며 산제가 드디어 끝났다.

“내년 한 해도 다치지 말고 씩씩하게 즐기자”는 슬로건.

이렇게 오늘 내년 산행도 건강하게 즐기자는 산제 숙제를 말끔히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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궂은날에도 온기와 웃음을 보태준 한미산악회의 아름다운 동행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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