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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앨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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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창밖 좀 보세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요.”

전화기 너머, 형님은 한참 동안 묵묵부답이다.

 

“하늘에 구멍 뚫린 것처럼 퍼붓는데, 오늘 산행은 당연히 취소겠지요?”

1초의 지체도 없이 날아와 귓전에 꽂히는 타이슨 핵펀치.

“야, 이놈아. 너는 비 온다고 밥 안 처먹냐?”

 

아아, 그랬다.

까까머리 입산(入山) 시절, 산선배들에게 배운 요상하고도 무지막지한 선문답.

 

날이 개면 해가 나서 오르고, 비 오면 비가 와서 오르고, 눈 오면 눈 밟으러 오른다.

그 기괴한 ‘개똥철학’에 속아 넘어간 지 수십 년.

 

내 팔자는 진즉에 세뇌되어 오늘도 이 모양 요 꼴로 주섬주섬 배낭을 챙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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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43회 산악축제가 열리는 날.

머피의 법칙도 아니고, 국민학교 소풍날 비 오듯 하늘은 오락가락 빗줄기를 뿌려댄다.

 

일기예보는 한술 더 떠 “집 밖으로 나오면 큰코 다친다”며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헌데 취소 문자 한 통 없는 걸 보니, 산신령의 후예들은 기어이 산제를 올릴 모양.

 

라운드 피자 앞, 비가 와도 꼬박꼬박 밥 챙겨 먹는 위인들이 어김없이 모여들었다.

우리 회원들과 한미산악회 식구들이다.

 

비에 젖을까 애지중지 싼 제물과 장비를 트렁크에 나누어 싣는다.

차는 물안개를 가르며 아이스하우스 캐년으로 향했다.

 

평소 주말 같으면 ‘주차 자리 하나만 굽어살펴 점지해 주옵소서’ 기도는 기본.

오늘은 그런 비장한 기도는 필요조차 없다.

 

이 비바람 속에 산에서 밥 처먹겠다고 기어 나올 인간들이 우리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기도 생략은 지극히 합리적인 ‘통빱’ 덕분이다.

 

그 잔머리는 기가 막히게 적중했다.

수십 년 산을 타면서도 구경도 못 해본 명당자리에 보란 듯이 차를 댔다.

 

하지만 주차장을 둘러보니, 우리 과(科)와 핏줄이 같은 환자들의 차가 제법 눈에 띈다.

세상에 산 귀신이 우리뿐만은 아니었던 게다.

 

오버트라우저를 껴입고, 비닐 우의를 뒤집어쓰고, 한 손엔 우산을 받쳐든다.

무장공비 뺨치는 각각의 행색으로 아이스하우스 캐년에 발을 들였다.

 

그런데 웬걸, 걸음을 뗄수록 마음이 씻겨 나간다.

흙먼지가 날리지 않아 우선 살 것 같다.

 

지난주 100°F를 넘나들며 사람 진을 빼던 지옥 불 더위가 간 곳없다.

발밑의 길은 당연히 촉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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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먼지 나던 그 삭막한 트레일이 맞나 싶을 만큼 완전히 딴 세상.

비에 젖은 솔잎마다 크리스털 보석을 올망졸망 매달고 있다.

 

지난주엔 찾아도 없던 가을 단풍이 젖은 길 위로 노란 융단을 깔아놓았다.

변덕스러운 마눌님 속마음처럼, 가을 산의 시계는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이 코스의 진가는 본디 고즈넉함이라 했다.

 

골짜기에서 피어오른 운무가 겹겹이 산허리를 감싸 안고 있다.

그러므로 눈앞에 펼쳐지는 풍경은 완벽한 한 폭의 실경산수화다.

 

배불뚝이 신선이 부채들고 폼 잡는 과장된 몽유도원도가 아니다.

사물이 숨 쉬고 박동하는 진짜 천상화원이다.

 

“비 온다고 안 왔으면 억울해서 눈물 날 뻔했네.”

처음엔 투덜대던 누군가 입에서 절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우중산행(雨中山行)이 대체 얼마 만인가.

맑은 날의 산은 화려하게 화장한 얼굴이라 볼 수 있다.

 

비 내리는 날의 산은, 수줍게 감춰둔 비밀스러운 속살을 보여주는 유혹이다.

투닥투닥 나뭇잎을 두드리는 빗소리.

 

우렁차게 흐르는 계곡 물소리가 어우러져 천상의 교향악을 연주한다.

비를 흠뻑 머금은 젖은 흙내음과 물기를 품어 배로 짙어진 피톤치드.

 

습기먹은 향기가 코끝을 넘어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인적 끊긴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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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전체를 통째로 전세 내어 오리무중(五里霧中)의 안개 속을 묵묵히 걷는다.

이 순간만큼은 백악관에 앉아 욕먹는 대통령도 부럽지 않은 절대의 자유.

 

가을비 한 번에 추위가 성큼 온다고 했다.

하지만, 산을 제 살처럼 아는 산꾼들에게 추위는 두려움이 아니다.

 

오늘 숲을 적시는 이 비는 머잖아 산정에 순백의 설산(雪山)을 빚어낼 전령이다.

우리는 이미 그 은빛 세상을 기다리고 있는 중.

 

계절이 바뀌는 길목마다 산은 언제나 우리에게 다른 얼굴의 기쁨을 선물한다.

인적 끊긴 시더 글렌 캠프장에 닿았다.

웅장하던 산봉우리들이 하얗게 지워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신비로운 운무의 공연.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정성스레 산제를 올렸다.

이토록 영험한 안갯속에서 올린 제사이니 효과 따블.

 

올 한 해 우리 산악회 앞길에 산신령인들 복을 안 내려주고 배기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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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동양화처럼 우아하고 신선놀음 같았던 낭만의 기록이다.

이제, ‘진실’을 고백할 차례다.

 

집행부가 바리바리 짊어지고 올라온 제사 음식들이 펼쳐졌다.

원래 제사 뒤에 음복하는 고기와 전이 천하일미라 말들 한다.

 

하지만 오늘 산신령의 제사상 음식은 당연히 찬 밥이다.

사람들의 시선과 발걸음은 오직 한곳.

 

한미산악회 박종석 회장과 노만곽 회원이 버너로 끓여내는 ‘라면 냄비’.

장사 참 잘 된다.

이유는 당연한 것,

 

은근히 뼛속까지 시려오는 추위 때문이었다.

걸을 때는 몰랐으나 제사 지내느라 음하고 서서 움직이지 않아 그렇다.

 

비에 젖고 땀에 절었으니, 신선이고 천국이 남의 나라 이야기다.

몸뚱이는 그저 ‘뜨끈한 국물’을 갈구하는 가련한 중생.

 

손을 덜덜 떨며 라면 국물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기던 누군가의 젖은 얼굴.

콧물을 훌쩍이면서도 궁물 한 모금에 세상 다 가진 듯 배시시 웃는다.

 

그 꼴을 보는데 문득 유행가 한 구절이 귓전을 스친다.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제사를 무사히 끝내고, 흔적 하나 없이 청소를 끝낸 뒤 하산길에 올랐다.

너덜지대를 내려오며 등산화 밑창으로 전해지는 묵직한 피로감.

 

그 속에서도, 밀린 숙제를 완벽하게 끝낸 아이 같은 후련한 해방감이 든다.

내년 일년도 무탈하게 산을 즐길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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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의 대미는 반전이었다.

존재감 하나만으로도 산악회의 든든한 기둥인 김명준 회원님의 화끈한 ‘한턱’.

 

로렌하이츠 용문루 중식당.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뜨거운 짬뽕 국물과 요리가 넘쳤다.

세상에, 간만에 찾은 이 식당 음식이 원래 이렇게 눈물 나게 맛있었나 싶다.

 

비에 젖은 몸으로 산을 내려와 둘러앉아 마주하는 온기.

이것이야말로 오늘 산행이 우리에게 베풀어 준 가장 진짜배기 축복이라 할 것이다.

 

 

 

 

 

 

뜨끈하고 황홀한 만찬을 선사하신 김명준 형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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