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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봄 날은 간다

2006.05.08 11:16

나마스테 조회 수:562



1

어떻게 이 촉감을 표현 할까.
투명에 가까워 손대기가 두려운 보드랍고 여린 살결.
촉촉이 젖어 있는 피부는 금시라도 터질 것처럼 긴장 속 팽팽하고.
그러나 나는 조심스레 그 살결을 쓰다듬는다.
척추를 타고 전이 되는 황홀한 느낌 또는 환희.

봄비가 씻어 낸 지리산 하늘은 가을처럼 투명하고 높다.
숲속 바람은 끈적이지도, 서늘하지도 않고 삽상하다. 온통 푸른 색깔로 눈에 드는 힘찬 준령을 건너온 바람이라 그랬을 것이다.  
간밤의 숙취로 침낭 속에서 빠져 나온, 흐리멍텅했던 내 눈은 초록 세상에서 한층 맑아진다. 이 초록 화엄세상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

에베레스트를 다녀와 한국에 들렸던 김동찬 시인과 봄이 한창인 산을 함께 오르며 물었다.
“가만히 보면, 같은 봄 산의 녹음도 그 색깔이 제 각각 달라. 수백 수천 종류라 내가 아는 단어로는 제대로 표현 할 길이 없어.”
그는 간단히 정의 한다.
“신록新綠이네요.”
신록이라... 새롭게 태어 난 초록빛.
그러나 난 선뜩 그 말에 동의 할 수 없다.
뭉뚱그려 초록이다, 혹은 푸르름이다라고 말하기엔 어딘가 속상하다.
눈앞에 펼쳐진, 초록 잎새들이 만든 초록 바다는 분명히 하나의 색깔이 아니다.
분명히 농담濃淡의 세계다. 묽고, 짙고, 무성하듯 하면서 허허롭고 싱거운 듯 촉촉하다.

바람에 흔들리며 일제히 손사래 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보면 막막해진다.
그 개체수를 셀 수 없어 무량대수無量大數다.
전체이며 하나로 독립한 생명체들이 저마다 손짓하는 언어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분명히 눈에 보이는 다른 색감을, 한 단어의 범주에 넣기에는 많이 섭섭하다.
사람 사는 동네는 이미 꽃이 졌지만, 지리산 깊은 산엔 이렇게 봄이 늦었다.

2

산행 때마다 나는 자연의 비밀스런 속삭임을 듣고, 보려 한다.
짧지 않은 산과의 인연이지만 한 번도 똑 같은 느낌을 산속에서 가져 본적이 없다.
뭐, 그렇다고 식물학이나 철학적 사유를 한다는 건 아니다.
그저 재미있기 때문이다. 건강한 땀을 흘리는 중에도 나무들을, 풀들을 유심히 본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 미세한 변화를 관찰하는 건 누가 시키지 않은 자유로운 사유기에 행복하다.

겨우내 눈 속에서 삭정이처럼 서있던 나무들이 이렇게 봄이 되면 여린 촉을 틔워 낸다.
그 작은 눈뜸도 경이롭지만 그 투명한 색감과 부드러운 촉감에, 공연히 한번 쓱- 만져 볼 때가 있다.
놀라움이다. 어디에 이런 예쁜 생명이 숨어 있었던가.
발밑에 밟히는, 작년의 상수리나무 낙엽은 얼마나 억세었나. 등산화에 밟혀 서걱이는 낙엽들도 이렇게 태어 날 때는 한없이 부드러웠을 것이다.
조심스레 새순을 만지는 느낌은 꼭 어린 아가 볼을, 앙증스런 손을 만지는 것 같다.  

간밤의 비가 그치고 나니 또 숲의 색깔이 달라졌다.
하룻 사이에 좀 더 완강한 초록이다. 눈에 드는 녹색의 준령이, 여러 색깔 속 하나로 넘칠 만큼 충만하다. 철쭉이 만개하면 여름이 온다고, 더워지는 햇빛과 잦은 비는 이제부터 좀 더 숲을 더 강인한 색감으로 키워 갈 것이다.  
숲을 관조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이 아기가 커가는 과정을 보는 것과 같다.
아기가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과 식물의 사계절은 너무 닮은꼴이다.
아기가 엄마의 젖을 먹으며 점차 커간다면, 숲은 봄비를 먹고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무탈하게 키우려는 부모들의 정성이 있다면, 나무들은 자신들을 어우르는, 바람과 햇빛이 있다.

아기가 소년이 되고 청장년이 되다 드디어 한 세상 인연을 다한다는 걸 생로병사生老病死 라고 한다면, 사계절을 보내는 나뭇 잎새 역시 그러하다. 여리고 여린 투명한 새순이 점점 자라나, 뻣뻣한 잎이 되어 가을을 예비하다가 종 내 낙엽 되어 땅으로 돌아가듯. 사람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자연의 시계는 늘 정직하고 언제나 정확하다.
한없이 가벼운 여린 초록 잎새가 일깨우는 자연의 순환을 보면서, 사람 사는 세상은 너무 바쁘게 돌아감을 안다.
비 온다고 우산 쓰고 나가는 유일한 동물이 사람이라 그런 건가?

사진: 임흥식씨 민디, 김동찬씨와 그의 형님과 함께 한 우면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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