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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연필로 쓰기」

2006.06.17 23:54

김동찬 조회 수:497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안 가득 넘치더라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하는 자의 비겁함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정진규 (1939 -   ) 「연필로 쓰기」 전문

나의 아버지는 어렸을 적 새 학년 새 학기가 시작하면 늘 연필을 깎아서 필통 속에 가지런히 넣어주셨다. 헌 종이 위에 문질러서 연필심의 끝이 너무 날카롭지 않게 만드는 일도 잊지 않으셨다. 아버지도 내 생애가 잘 씌어지길 바라고 또 잘못 씌어진 부분이 있으면 지우개로 잘 지워갈 수 있게 되길 바라셨을까. 무엇보다 향그런 영혼의 냄새를 지니길 바라셨을 게다. 컴퓨터로 이 글을 치면서 너무 쉽게 쓰고 너무 쉽게 지워지는 내 삶, 향기 없는 내 생애를 떠올리니 서글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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