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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2006.05.31 22:28

김동찬 조회 수:428

4·19가 나던 해 세밑/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반갑게 악수를 나누고/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하얀 입김 뿜으며/열띤 토론을 벌였다/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정치와는 전혀 관계 없는 무엇인가를/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다/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겨울밤 하늘로 올라가/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회비를 만 원씩 걷고/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부끄럽지 않은가/부끄럽지 않은가/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김광규 (1941 -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전문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보려고 피를 흘렸던 4.19 세대는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는 기성세대가 되었다. 짐짓 옛 사랑을 잊어버린 것처럼 돌아서는 그들의 뒷모습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보인다. 내 마음까지 닿는 긴 그림자, 쓸쓸하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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