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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정님이」

2006.05.15 23:02

김동찬 조회 수:478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학교도 못 다녔으면서/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콩깍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 주더니/왜 가 버렸는지 몰라/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여름 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정성껏 삼을 삼더니/동지 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한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방직 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이시영(1949 -    ) 「정님이」전문

 이시영 시인의 작품은 이처럼 담백한 서술로 말하듯이 씌여진 시들이 많다. 쉽지만 가볍게 잊혀지지 않는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정님이'는  차범석 원로 극작가가 팔순기념으로 펴낸 책 <옥단어>의 '옥단이'나 공지영 소설가가 쓴 '봉순이 언니'의 또 다른 이름이다. 배고픈 시절을 보내면서 우리가 돌보주지 못했던 가여운 영혼들에 대한 참회록이자 진혹곡이다. '정님이'에 대한 연민은 어쩌면 우리들의 누나, 어머니, 더 나아가서는 우리들 자신에 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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